아마존 스피어즈를 다녀와서
5/18/2025 주일 목양칼럼 / 조샘 선교사
아마존 스피어즈를 다녀와서
아마존을 보러 가자 했을 때 난 회사 방문을 생각했다. 근데 실제 아마존이었다. 회사복지 차원에서 스피어즈라는 식물원을 만들고 열대우림을 가져왔고, 곳곳에서 직원들이 쉬고 대화하고 있었다.
회사 근처 광장 한 곳에 바나나를 매일 무료로 나눠주는 카트. 지나가는 누구나 가져갈 수 있다. Volunteer booth. 회사원들이 업무시간에 사회봉사할 수 있는 천막에서 함께 일하는 이벤트. 가난한 이들에게 줄 선물 꾸러미를 꾸린다. Dog park. 애완견을 놀릴 수 있는 파크도 마련되어있다.
아마존은 작년 기준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회사이다. 1994년에 시작한 30년된 회사이고 재벌집 아들이 아닌 보통 청년이 만들었음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 아닌가? 유통 회사이지만, 그 핵심인력들은 전세계에서 모은 개발자들이다. 인도, 중국, 한국 등. 수많은 젊은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이 함께 일하고 있다. 선교현장에서도 그렇지만, 비즈니스 세계에서 미국인들의 창의성에 늘 놀라곤 한다.
미국인들의 강점은 Why not? 의 실험 정신. 사실 경영학에 있어서 미국인들의 다양한 시도들이 그 내용을 대부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대안들의 등장은 무척 중요하다. 대부분 사람들은 실례가 있을 때만 믿고 학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효과적인 분업 시스템, Flexible work schedule. 워러벨 (Quality of work), 성과급 및 다양한 동기부여방법, 투명한 거버넌스, 재택근무, 행동과학의 도입, 온라인 유통 등등 수많은 매니지먼트 기법들이 미국에서 나왔다. 특히 내가 가장 궁금하게 생각하는건, 자본의 효율적 배분이다. 소유와 자본의 분리. 신생 기업들에게 꾸준히 자본이 공급됨으로서 새로운 아이디어들의 시도가 가능해진다.
만약 그 대안들이 없었다면?
19C 영국은 어린아이들이 노동에 동원되었고, 과도한 노동시간으로 사람들이 혹사 당함으로 자본주의에 회의를 불러일으키고 막시즘이 자라는 토양을 만들었다. 일본식 HR 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남녀의 철저한 차별시스템. 노조에 대한 적대적 태도. 지주회사를 통한 자본공급으로 생겨나는 문어발식 게이레쯔 (계열) 와 자이바쭈 (재벌) 거버넌스. 정규직 남자들은 가이샤인 (회사원) 으로 구분되어 많은 혜택을 받지만 대신 카로시 (과로사) 로 죽을만큼 일해야 했다.
한국의 경영시스템은 이 일본식을 그대로 가져왔던 것이었고 수많은 문제를 남겼다. 재벌 기업들의 잇달은 성공 가운데 그 외의 다른 경영 방법을 생각하기 힘들었다. 미국식 경영교육과 사례들의 등장이 없었다면, 그나마 새로운 활력과 돌파를 생각할 수 있었을까?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근본적 한계들이 있고, 여전히 해결해야할 숙제들이 많다. 그렇다면 문제해결을 해야 한다. Why not? 미국인들의 강점은 스마트한 것도 아니고, 생각이 깊거나 철학이 강한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두려움없이 시도하고 실패에 낙인찍지 않는 실험정신과 상상력과 팀웤에 있다.
비판은 성찰 Reflection 을 줌으로서 실수를 줄이고 균형을 준다. 그러나, 새로운 시도가 나오기는 어렵다. 두려움이 생기기 때문. 반면 격려는 상상력 imagination 을 줌으로서 새로운 시도를 만든다. 인간 문명의 발달에 성찰과 상상력은 모두 필요하다. 어쩌면 비판과 성찰이 약해보이는 미국 문화가 여러가지 새로운 대안을 격려와 상상력으로 만들어내는 모습은 늘 놀라움을 준다.
사람들은 마치 자본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저절로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을 찾아간다고 말하곤 한다. 꼭 그렇지만은 않다. 사람은 경제적 동기에서 움직이지만, 동시에 놀라울 정도로 사회적이다. 효율적인 추구가 아니라 사회적인 인정과 제도화에 의해서 실험적 진보나 새로운 시도들이 갇혀지게 된다. 인간 집단성에 의한 함정. 그걸 깨는 것은 자본 스스로가 아니라, 개인성이 살아남이다.
아.. 이 개인성의 발견과 창조적 실험이 어찌 기업에게만 필요하랴? 난 어쩔 수 없이 교회를 생각한다! 초대교회의 개인성과 실험성이 지금의 한국 교회 가운데 필요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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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강사로 오신 조샘 선교사님의 글을 목양칼럼에 대신합니다.